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1:17) 잘 아시는대로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것입니다. 전체 주제가 뭘까? 아마 각자의 견해가 차이가 있겠지만 저는 오늘 우리가 함께 보았던 16절과 17절이 주제가 되는 말씀이 아니겠나 생각 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 서신을 쓴 것은 15절 본 것처럼, 나는 할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모든 성경 66권이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특히 로마서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쓴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로마서 전체를 다 말해야겠지만, 전체를 다 알기 위해서는 16절 17절이 정말로 복음을 깨달아가는 만큼은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바로 깨닫는 것이 맞다면 실제로 우리 자신에 체험 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이전에 복음을 깨달아야 된다 그런 말 많이 했잖아요. 참 깨달으려고 굉장히 많이 노력했어요. 성경도 많이 배우려고 노력했고, 깨닫기 위해서, 신학도 그래서 복음을 깨달으려고 신학을 한 것이죠. 성경을 알아가는 것이 참 좋은 것인데, 신학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런데 이미 저와 여러분들이 그런 과정 속에서 왜 성경을 바로 알아가고, 신학을 바로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실제 체험속에서는 부족할 수 밖에 없었습니까? 부족한 것만 아니라. 전혀 은혜가 없었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과정 속에 변화가 없었던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증거도 있었고, 하나님의 역사도 많이 체험했죠.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몰랐지만, 제가 부족했다고 표현한 만큼은 성경을 아는 지식이 우리를 어떻게 했습니까? 신학을 아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습니까? 나 자신이 이후에 조금 하나님의 은혜로 이런 사실 깨달아가면서 보니까, 참 부족했던 만큼은 차라리 성경을 몰랐던 것이 더 나을 뻔했구나 그런 만큼 신학을 모르는 게 나을 뻔 했구나 싶은, 그런 믿는다고 하는 내 모습 속에서 그때는 몰랐는데 정말 복음을 십자가로 깨달아가는것이 뭔지, 하나님의 은혜로 조금씩 깨달아 지는 만큼 체험되는 만큼 이게 보여지더라고요. 바로 나 자신이 문제 면서, 나 자신의 문제로 보여지는 만큼 모든 믿는 자들 속에 동일한 보지 못하는 문제 구나, 복음, 맞아요. 복된 소식이지 않습니까? 아마 복음이 없었다면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도 필요 없겠죠. 사도 바울이 서신 중에 그런 말을 한것이 있죠?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 내가 말로만이 아닌 그 말이 뭐죠? 앞서 말씀 드린 것 처럼 참 부족했던 그 부분들 속에 이걸 모르면, 점점 우리 자신은 육신이라고 하는 복음은 절대 우리 육신 세계 갇히는 것이 아닌데, 우리 스스로 복음을 가두죠. 그러한 실제를 예수께서도 이렇게 표현 하셨어요. 등경을 말 아래 가두는 자가 없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참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한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복음을 깨달아 가면서 오늘 함께 본 본문, 설교를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지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을 구원하셨고 구원하시는 일 속에서 말로만 아닌, 실제로 내 인생 속에 구원하는 능력으로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체험되는 만큼 짧은 주제 되는 내용인데 아뇨 성경 66권을 연결 시켜서 말을 해도 할수 있을 것 같아요. 17절 특히 잘 보세요.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저는 한 단어, 한 문단 이 의미가 얼마나 귀하고,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여러분 복음이 뭡니까? 사도 바울이 로마서 1장 2절에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1:2) 복음은 그리스도죠.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사도 바울이 증거해 주는 것 처럼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언제 죠? 그래요. 창세기 3장의 사건인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죄 가운데 빠지면서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수고하며 땀을 흘릴 때, 저주 받은 땅에서 살아갈 때, 그래서 인생은 가시와 엉겅퀴와 찔림 속에서 살아갈 때, 아니 종신토록 하나님께서 마귀에게 뱀에게 너는 흙을 먹고 살찌라, 사망의 권세 잡은 마귀의 고통 속에 살아갈 때 그렇죠? 언제까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찌라. 개인 적으로 그렇죠. 좀더 넒은 의미에서, 주의 재림 때 까지죠. 창세기 3장을 보면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 실과를 따먹고 죄 가운데 빠지면서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그 때 부터 인생은 수고, 땀을 흘려야 되고, 그때 부터 예수 께서 오셔서 말씀 하신 것 처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의 인생 속에, 사도 바울의 증거 대로 말한다면, 영적으로 죄와 허물로 죽었을 때죠. 육신적으로는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랐고, 그래서 이 세상 풍속을 쫓아 살수 밖에 없었던 때죠. 그런 첫 사람 아담과 하와 창세기 3장 속에 찾아오셨죠.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두려워하여 나무 숲 사이에 숨잖아요. 이게 영적인 어둠의 잡혀 있는 상태를 이렇게 나타내주고 있는 것이죠. 이게 바로 인간이 죄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성경이 그렇게 나타내 주는 거예요.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래서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을 멸망 가운데 빠지도록 내 버려 두지 않으시고 구원하시기로 찾아와 주셨는데 인간은 어둠 가운데서 죄 아래 갇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빛으로 찾아와 주신 그 하나님, 생명의 빛을 영접 할수 없는 거죠. 아니 만물을 창조했던 창조의 빛 볼수없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죠.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내가 먹지 말라 한 실과를 먹었느냐? 하나님이 모르셔서 아담을 부르신 것일까요? 불러도 깨달을 수 없어요. 아니 음성으로 들릴 수는 있겠지만, 두려움 속에 더 깊이 숨길 수 밖에 없는 음성이에요. 하나님은 생명의 빛으로 찾아오셔서 죄와 허물로 죽은 지금 아담과 하와를 살리려고 하는 것이고, 그래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건져내려고 하는 구원의 음성인데, 이게 중요한겁니다. 하나님이 지금 아담아 아담아 부르심은 하나님 말씀이잖아요. 분명, 인간을 사랑하시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사랑의 음성인데, 그래서 찾아오신 건데, 인간은 이미 죄 가운데 빠져 있기 때문에, 어둠에 갇혀 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두려워 할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둠 가운데 자신을 숨길 수 밖에 없는 거죠. 이게 인간의 죄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첫사람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성경은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은 소망이 없어요. 왜?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죄와 허물로 죽었어. 죽은 자는 그 영이 죽었기 때문에 육신도 죽어가는 것뿐인데 마치 금방 자르면 있었던 영양분 때문에 얼마간은, 똑같은 거예요.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은 이미 영이 하나님의 생명을 떠난 것이기 때문에, 그럼 영만 죽은 겁니까? 모든 것이 이미 사망이 온 거예요. 그런 면에서 창세기 3장의 선악과를 따먹은 이후에 아담과 하와의 상태를 통해서 인간의 죄의 상태가 무엇인지 얼마나 잘 드러내 줍니까? 하나님이 부르신 것처럼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내가 먹지 말라 한 실과를 먹었느냐?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마귀가 어떤 존재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내가 지금 죄와 허물로 죽은 내 영적 상태가 어떤 상태인 줄도 모르고 그래서 하나님을 찾아갈 수도 없고 만날 수도 없는, 인간은 소망이 없는 이런 상태도 몰라요. 이걸 한 마디로 인간은 죄인이다. 이렇게 말하는 거죠. 하나님을 떠났 다라고 표현하죠. 아니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 때부터 마귀에게 속하였다 표현하는 겁니다. 떨어진 게 아니고 하나에요. 이걸 한 마디로 상태. 영적인 상태. 그래서 요한 복음 3장 16절에 사도 요한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 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천년전에 오신 그 분이 바로 구세주여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지만, 그 약속은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죄 가운데 빠지고 소망이 없었던 인간의 상태 속에 찾아오셔서, 찾아왔지만 인간은 나무 숲 사이에 숨길 수 밖에 없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쉬지 않죠. 여러분 우리 인간은 만나기 싫은 사람 그런데 만나야 돼. 그럼 틀림없죠 그런 사람들 만날 때 만나고 싶지 않을 거예요. 그럴 때 아마 경험했을 겁니다. 핑계 대서 나도 상대방 속에 나타나는 그 사람들의 반응과 상태 속에서 피하고 도망 가고 싶은, 인간이 지금 어떤 상태죠? 죄 가운데 빠지고 마귀에게 속했다니까. 요한일서 3장 8장에도 나오죠. 죄를 짓는 자 마다 마귀에게 속하나니, 그럼 하나님 떠난 상태 속에서 그럼 하나님 편에서는 만나기 싫은 자죠. 하나님이 말씀을 안하셨으면 몰라도 창세기 2장 17절, 에덴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지 마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이미 약속하셨잖아요. 그런 인간에게 하나님은 단순히 먹지 말라고 한것만 아닌, 영생 나무의 열매 생명 나무도 주셨잖아요. 그죠? 그럼 아담과 하와는 이게 바로 스스로 거든요. 스스로, 그래서 마귀에게 속으면 스스로가 나와요. 그 스스로는 하나님의 약속안에서가 아니에요. 그 약속 안에는 먹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의 열매 이게 은혜 주시는 영생이요 축복인데 거기에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복 주시는 하나님의 일이 있잖아요. 스스로, 언제? 뱀 속에 들어간 마귀가, 먼저는 하와를 속이고 속임을 당한 하와가 결국 아담도 속인 거예요. 속이려고 해서 속인건지. 속이는 줄 모르고 속였던지 상관없어요. 인간은 알면서도 속고, 모르면서 속고 사는 인간인데, 한마디로 뱀속에서 아담과 하와를 속이게 뭡니까? 선악과 따먹게 한 것입니다. 선악과 따먹는 이것이 스스로 행한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 약속을 파괴 한 것이요.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 주시는 그 일도, 스스로 파괴 한 것이요. 버린 거죠. 첫 사람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보여준 것처럼 우리 인간은 속 힘을 당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 말은 죄 가운데 빠질수 있다는 거예요. 먹음직 보암직 탐스러운, 오히려 그것이 좋은것 같고, 그것이 인간이 복 받는길 같고, 그래서 인간은 마귀에게 속으면, 속고 있다는 것만 모른 채 바른길 찾아가요. 스스로 이것만 모른다니까. 하나님의 약속안에서는 내가 아니야. 하나님이 하시는 일속에서 에요. 그래야만 내가 사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내 인생을 주장하시고 다스리시고, 그 안에서 약속이 있고 그 안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복 주시는 그 안에 영생의 삶이 있고 복을 누리는 삶이 있잖아요. 스스로! 잊지 마세요. 좀더 우리 실제 삶에 적용해 볼까요? 제가 말씀 마다 계속 강조하는 문제, 나로! 사도 바울의 서신서대로 나온 표현대로 한다면 옛사람! 옛사람 속에 행하는 그 안에 의미적인 표현 속에서는 육체! 육신! 혹시 이 말을 이원론에서 주장하는 영과 육의 그런 개념으로 생각 하지 마세요. 이원론은 분리 시키잖아요. 영과 육은 다른 것이지만, 인간 속에서는 분리 될 수가 없어요. 그렇죠. 왜 그렇습니까? 육신, 질그릇 아닙니까? 바울의 표현대로, 거기에 보배를 담았어요. 영! 보배 여러가지 의미로 생각 할수 있겠죠. 그리스도를 보배로 생각 할수도 있겠고, 그리스도 안에 영생을 보배라고 생각 할수 있고, 아니, 그리스도 만이 아닌,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거니까. 성령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배를 담았다고 할수 있겠죠. 아니, 새 사람이라는 것도 의미적으로 생각할 수 있어요. 스스로! 이게 첫 사람 아담의 문제 면서 첫 사람 아담의 문제를 통해서 모든 인간 속에, 인간의 죄 문제가 뭔지, 그렇죠? 그 말은 죄를 어떻게 짓게 되는지, 죄를 지은 결과가 무엇인지, 죄 가운데 살아가는 그 상태가 무엇인지, 결과가 무엇인지 그대로 창세기 3장은 보여주고 있는 거예요. 그렇죠? 그래서 정말 죄 문제를 보면 볼수록 인간은 소망 없어요. 여러분 죄 자꾸만 알려고 하지 마세요. 아는 만큼 갇힐 거니까. 여러분 죄를 알아야 은혜를 받는다? 아니에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그 일이 죄인을 구원하시는 일이에요. 그 말은 인간이 죄를 안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게 아니에요. 우리 자신이 죄를 통하여 구원을 받으려고 할수록 구원과 상관되는거냐, 점점 죄 아래 갇혀 들어갑니다. 왜, 죄를 아는 선과 악의 눈이 밝아지는 만큼 잡히게 되요. 그래서 믿는 자들이 이런 문제 속에서 이런 몰라도 믿다 보면 자꾸만 선과 악의 죄를 보는 눈이 밝아져서 자신도 힘들고 남도 힘들게 판단하고 정죄 할수 밖에 없는 거예요. 그럼 이제 구원만 생각 해야겠네? 그것도 우리가 아니라니까. 죄든 구원이든 아담과 하와가 구원 받아야할 죄인임을 안다면 하나님이 찾아오실 때 그렇게 나무 숲 사이에 숨겠습니까? 하나님은 아시고 아담아 아담아 네가 어디있느냐 불러내시면서 소망이 없는 인생 속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일은 상관없이 나타내고 계시잖아요. 찾아오신 것만 아닌 빛을 비춰주신 거잖아요.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모습은 하나님이 내게 짝지어준 하와가 먹게 했다고 하잖아요. 이게 아직도 죄 아래 육신에 속하여 살아가는 상태를 이렇게 보여주는 겁니다. 지금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립니까? 바울이 말한 2절 말씀.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롬1:2) 그 약속대로 그리스도가 이 천년 전에 사도 요한은 그 분이 만물을 창조 하셨던 분이라고 증거 하고 계시고 창조의 빛으로 생명의 빛으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증거하잖아요.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요한 복음 3장 16절, 이 천년 전에 오신 그리스도, 그 분이 그리스도다. 선지자, 모세오경을 기록한 게 누구에요? 모세에요. 이미 창세기 인간이 죄 가운데 빠진 그러한 인간 속에 찾아오셔서 소망이 없는 인간 속에 정말로 복음을 바로 깨달아 가기 위해서 먼저는 바로 이해가 되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가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냥 일이 아니고 인간의 상태를 보시라니까. 첫 사람 아담이 범죄 함으로 로마서3장 23절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그 뿐 아니죠. 한 사람이 범죄 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인 됨으로 의인은 없나니 한 사람도 없다. 한마디로 인간은 소망이 없다. 스스로? 살아가는 인생도 그렇지만, 스스로 속에서는, 그래서 신앙 생활 그런 만큼 부족한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 만큼은 종교를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기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러잖아요. 맞아요. 그러면서 그 이유를 말하죠. 왜 기독교가 종교가 아닌지, 그리스도만 죽으시고 부활 하셨기 때문에, 맞아요. 이것만 갖다 대도 다른 어떤 종교 속에서도 죽음은 있지만 부활이 없잖아요. 그런데 그 죽음과 부활 죽으시고 사신 분이 누구죠? 그리스도 한 분 밖에 없어요. 그렇죠. 죽으시고 부활 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내사, 그의 죽으심,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우리에게 밝히 나타내셨죠. 그런 면에서 구약에 선지자들을 통해서 나타내셨던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라는 이름속에서도 벌써 이것이 의미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겁니다. 여호와라는 말이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삼위 일체 하나님, 그 이름이 여호와래, 맞아요. 하나님은 구원을 계속 하시고, 계획 하신 구원을 하나님께서 제 2위가 되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사,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 그렇죠? 그 일을 어떻게 우리 인생 속에, 세상 속에 주 예수의 날까지 나타내시나요? 성령으로! 그래서 제가 가끔 가다가 그러죠. 여러분 삼위 일체 하나님 지식으로 잘 배우면 이해가 되고 믿을 수 있다고, 그런데 그렇게 알아서 믿는 삼위 일체 하나님 교리일 뿐이라고, 그것도 중요하지만, 몰라도 어느 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 구원 받은 자의 인생 속에 삼위 일체 하나님이 체험된겁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니까, 여호와의 일이 그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일 속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거듭났기 때문에, 몰라도 구약의 약속됐던 메시야, 2천년 전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다 이루셨다고 하신 지금도 살아계신 그리스도 그 분이 나의 구세주가 된 겁니다. 아니 몰라도 그 일이 우리가 은혜 받을 때 성령의 역사 속에 역사 만이 아닌 기름 부음을 통해서 그죠. 은혜 받은 이후에 배우면 믿어져요. 그러나 교리로만 알지 마세요. 믿지 마세요. 평생을 또한 믿는 자의 구원 받은 자의 삶 속에 사도 바울의 표현대로 증거 대로 예수의 죽음을 항상 몸에 짊어져 보시죠. 그러면서 예수의 생명이 죽을 육체 가운데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는 이것이 지식이 아닌 실제 믿는 자의 삶,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잖아요. 거듭났을 때는 영생을 얻는 생명을 얻는 거듭남이라면 그 이후에 천국 부르는 그날까지는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십자가로 그러면 교리로만 알았던 삼위일체 하나님이 믿는 자의 삶 속에 하나님의 임마누엘 하심 속에 그 분에 일과 믿는 자의 삶으로 구원의 일 속에서 체험되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조금씩이라도 그를 향한 새롭고 산길을 주셨음을 기죠? 항상 있었던 길인데 내가 이전에 말했죠. 구약의 성도들 믿는 자들도 약속대로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를 바라 보면서 실제 그 의미를 저들의 삶 속에 누리면서 증거해 주신다고, 여러분 시편에 여러분 잘아는 85편인가요?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 있고 복 있다. 시온의 대로가 뭐에요? 약속대로 오실 메시야 그림자를 보고 저들은 믿음으로! 저들 삶 속에 체험하면서 이렇게 증거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말하잖아요.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에 많은샘들이 터져 나온다고, 여러분 그런 사람은 문제가 안와야되는게 아니고, 그 문제가 이미 삼위일체 하나님,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 속에 그 임마누엘이 뭡니까? 나를 구원하셨을 때만 아니고, 믿는 자의 삶 속에 그 일을 나타내고 계시잖아요. 조금씩이라도 믿는 자의 삶이 살아진다면 점점 그리스도 안에 구원의 길이, 믿는 자의 시온의 대로로, 이걸 체험해 보시죠. 바울도 그랬기 때문에 우리에게 증거하는 겁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우리의 영광과 족히 비교할수없다고, 아니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짐진것 같이 탄식함은 벗고자 함이 아니오. 짐진게 다 뭐에요? 인생의 고난이에요. 문제들이에요. 육신적으로 탄식하며 살아가는 거예요. 육신적으로는 다 던지고 싶어요.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무엇을 증거 합니까? 벗고자 함이 아니요. 이게 믿는 자의 비밀이에요. 덧입고자 함이라. 뭘 덧입어요? 이게 하나님이 구원하신 자들 속에 평생 구원을 이뤄가는 그의 죽음, 우리 육신에 짐진것 같이 탄식 하는 그 세계 속에서 육신은 어찌할수없는 벗어버리고 싶은 그 인생을 살아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믿는 자의 구원을 이뤄가는 삶을 통해서 덧입고자 함이니! 이게 하늘의 소망 아닌가요? 이게 바로 믿는 자의 삶 속에 천국을 침노하고 침노한 만큼 내 안에 덧입혀지는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 속에 그 나라가 임해가는, 이게 믿는 자의 믿음의 삶 아닌가요? 그래서 저는 말씀 드립니다. 창세기 3장에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죄 가운데 빠진 인간의 죄 문제 속에 찾아오신 하나님,, 주 예수의 날까지, 그죠? 그리스도는 이 세상의 구세주에요. 유일한 구원의 길이에요. 그때까지, 죄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치지 않겠죠. 어느정도?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하루가 천년 같이 천년이 하루 같이, 참고 기다리시면서 그래서 제 3일이 지난 후 성령의 역사, 그렇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심 속에 성령으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인생 속에 아담아 아담아 말씀으로 하나님의 약속, 그렇게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그죠? 여인의 후손을 보내사,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것이라.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무슨 말씀입니까? 언약의 말씀입니다. 소망이 없는 인간 속에 어느정도에요? 죽었다니까. 하나님 도 마귀도, 내가 누군지도, 인간이 처한 상태가 어떤 상태 인지도 구원이 필요한 존재인지 조차도 혼돈과 어둠 가운데 빠져 있는 인간 속에 하나님이 사랑으로 찾아오셔서, 말씀으로 저 혼돈과 어둠 속에 빛을 비춰 주시면서 그죠? 여인의 후손을 보내사,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의 후손은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 장차 여인의 후손으로 그리스도를 보내사, 인간과 세상의 모든 죄를 독생자 하나님의 아들, 그래서 육신의 몸으로 사람으로 오신 겁니다. 그 몸에 짊어지고 죽으시고 부활 하심으로, 골고다의 언덕이 보이십니까? 갈보리 십자가가 보이십니까? 십자가 위에 다 이루었다. 그렇죠?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 하사,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 서신에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때부터 여인의 후손,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으로 오실 분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창세기 3장 21절, 인간은 죄의 수치 허물을 가리기 위해서 무화과 잎으로 치마를 만들지만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이 할수없는 죄 문제를 그림자 적으로 보여주시죠. 하나님은 그 들이 보는 앞에서 죄가 없는 양의 피를 흘리고 죽음을 당합니다.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친히, 그 가죽옷으로 무화과잎으로 만든 치마를 대신하여 가려주시죠. 이게 그림자에요. 그림자 안에 하나님의 약속, 선지자들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 하신 것이라. 그 뿐이 아니죠. 애굽의 모세 때는 유월절 어린양의 피 뿌림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는 이 표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증거해주고 있는 겁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인간이 바라 본다고 해서 놋 뱀이 들리는게 아닙니다. 어떻게 사람이 저 홍해 바다에 들어갈 수 있겠어요. 하나님이 갈라놓고 지나가게 하시잖아요. 하나님이 친히 선지자 모세를 통해 놋 뱀을 달아 높이 들고 바로 보게 하신 하나님의 일이잖아요. 놋 뱀을 바라 본자들은 다 살더라.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 말씀의 의미가 조금은 다가옵니까? 그 의가 무엇을 말하는 겁니까? 복음에는 아셨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건 성령께서 계시가 아니면 우리 인생 속에 하나님이 그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비밀입니다. 증거 되는 복음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계시로 우리에게 나타내시지 않으면, 은혜가 아니면, 힘으로 능으로 할수없는, 오직 나의 신으로 될 수 밖에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 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언제부터 언제까지? 창세기 3장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그 때부터 아담과 하와가 아니라니까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은혜를 입은 자들 속에서 나타나는, 언제까지? 주 예수의 날까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이것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요. 구원 받은 것만 아니라. 이것 때문에 우리를 세상에 두신 거예요. 이걸 알고 우리 인생에 살아감이 무엇인지 이걸 알고 인생의 살아감 속에 믿는 자들이 믿음 생활이 무엇인지, 그 다음 말씀이 바로 체험 되어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시간이 됐기 때문에 오후 두시 반에 말씀을 계속 증거하겠습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