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2:1-11) 지난 주간에는 일본 센다이 집회와 동경 집회 진행하고 왔습니다. 이번 일본 집회를 하면서 빌립보서를 1장 전체를 한 것 같습니다. 일본에 일본 집회 딱히 무엇을 할까 기도 하면서 빌립보서의 마음을 주셔서 하게 됐고, 이번 일본에서 빌립보서 1장을 함께 말씀으로 나누면서 그 동안 저와 또 함께 은혜를 나누는 동역자들 교회와 성도님들 뭐 어떻게 사도 바울이 받는 고난과 비교하겠습니까 만은 그러나 참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우리 인생의 모든 일 속에 오직 하나 믿는 자들을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일이기 때문에 빌립보 1장을 함께 나누면서 많은 은혜를 증거하면서 받았고 또 한국에서 많은 성도님들이 오셨는데 참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1장의 말씀을 증거 한 것처럼 나의 당한 일이 너희에게 복음 전파가 진전된 것을 알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말씀의 의미를 사도 바울이 복음 때문에 당한 고난을 말하면서 그 고난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바울의 갇힘으로 갇힌 것만 아닌 그 뒤에 말씀처럼 시위대 안과 밖에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난 바 된 것처럼 그 일로 인하여 복음이 더 확산 되어지는 의미를 가지고 증거 합니다. 그 말도 맞죠. 그 밑에 내용을 보면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힘 당한 일로 인하여, 형제 중 다수가 겁없이 담대하여, 복음을 전파 했다고 했죠.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바울이 이 복음을 위하여 변증하기로 세우심을 입은 자 인줄 알고 사랑으로 했다 말했죠. 그런데 바울의 똑같은 그 일을 통해서 그런 믿음의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투기와 분쟁으로 그런 자들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혔고 당한 그 일을 가지고 더 바울을 괴롭게 할 마음으로 복음을 전파 했다고 했거든요. 빌립보서 1장 11절부터 보면 나의 당한 일이 너희에게 복음 전파가 진전된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했던 사도 바울의 말은 우리가 이제까지 알고 있던 의미 만이 아닙니다. 그 뒤에 나오는 바울이 당한 일로, 겁없이, 담대하게 사도 바울이 이 복음을 위하여 변증하기로 세우심을 입은 자로 알고 사랑으로 하는 자들만이 아닌, 투기와 분쟁으로 바울이 당한 고난을 오히려 더 괴롭게 할 마음으로 다툼으로 전파했다는 말이 뭡니까? 그래서 제가 말씀을 드렸죠. 성경에 문맥적으로 보면 저들이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던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기뻐하고 기뻐하겠다고, 이게 일반적인 의미 만을 말하는게 아니죠. 그 뒤에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내게 구원을 이룰 줄 아는 고로, 이거죠. 바울이 당한 이 로마 감옥에 갇힌, 이 어려움을 통해서 첫째는 사도 바울에게 하나님은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내게 구원을 이룰 줄 아는 고로,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의 신앙 입니다. 믿음. 그런 사도 바울이 있었기에 빌립보 교회, 똑같이 사도 바울이 당한 고난인데 형제 중 다수는 남자들만 있겠습니까? 많은 자매들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 되요. 다 기록 할수 없으니까 그렇게 기록한 게 아닐까 생각 됩니다. 이게 단순히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당한 고난이기 때문에 복음을 변증하기 위해 세우심을 입은 자라는 바울을 향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더 복음을 담대하게 열심히 전했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포함되는 말입니다. 바울의 그런 믿음이 첫째는 바울이 당한 고난을 통하여 바울 자신에게 구원을 이루어 가는, 그러니까 똑같이 바울이 당한 고난을 통하여 겉치레로 하는 자나 참으로 하는 자나 무슨 방도로 하던지, 믿음으로 담대하게 목숨을 돌보지 않고, 믿음으로 전파 한 거예요. 겉치레로 투기와 분쟁으로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다툼으로 전하는,, 그래서 그러죠. 여러분 복음을 우리 인생에 구원하시는 십자가로 깨달아 가다 보면 죽음과 부활에 참여된 만큼 부활의 세계는 그리스도안에, 하나님 나라, 영적 실상의 세계가 나오고, 그것이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다. 영적인 실상과 영적인 실상이 우리 육신과 떨어져 있습니까? 영에서 육으로, 이렇게 우리 인생의 구원을 십자가로 깨달아 가다 보면 하나님의 구원의 실상인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도 바로 알지만 그 영적 실상이 하나님이 믿는 자들 속에 구원의 은혜를 나타낸 만큼 나타나지는 우리 육신, 이걸 뭐라고 하냐, 우리 수준이다. 성경에 표현대로 한다면 헌부대죠. 모래 위죠. 말로 표현할 수 있고, 그래서 은혜 받아도 우리 수준이 뭔지 안다. 그렇죠? 사도 바울은 둘 중에 분명, 이것은 극단과 극단인데, 착한 뜻으로 하는 자. 또 한쪽은 투기와 분쟁으로 다툼을 가지고 하는 자, 그럼 우리는 육신 세계 속에서는 한쪽은 무시하고, 한쪽은 좋은 것으로 취할수밖에 없어요. 하나는 잘못된 것 하나는 잘하는 거잖아요. 우리는 잘하는 걸 보고 기뻐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럼 바울이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던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그 전파되는 그리스도를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의미가 잘하는 자들의 복음 전파를 말하는겁니까? 투기와 분쟁으로 바울을 괴롭게 하려고 복음 전파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일반적인 의미만 대부분 이해를 해요. 그럼 다른 거 없어요. 야 저렇게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한 이 사도 바울의 당한 일로 목숨을 돌보지 않고 담대함으로 바울이 이 복음을 위하여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입은 자로 알고 사랑으로, 그것만 복음 전파로 알죠. 그럼 투기와 분쟁을 가지고 바울이 당한 일 속에서 더 괴롭게 하려고 복음 전파하는 자들은 복음 아니라 하죠? 저들이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던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게 복음은 우리 인생에 모든 일들 속에 항상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거든요. 적어도 인간의 타락 창세기 3장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죄 가운데 빠져 있는 그 인간 속에 찾아오셔서 나타내셨던 구원의 일이죠. 그렇죠. 언제까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까지죠. 여러분 제가 왜 이걸 이렇게 강조하는 줄 압니까? 믿는 자들이 아니, 저 자신을 놓고 볼 때에도 아마 어쩌면 평생 일반적인 의미 만을 가지고, 그럼 성경이 맞지 않는데 내 수준 속에서 바로 알고 있는 줄 알고, 내 살아가는 인생의 수준 뻔하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고 하고, 구원의 확신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을 최선을 다해 잘 믿으려고 하면서도 어찌할수없는 속일수없는 육신 속에서 이게 혼돈의 문제였더라고요. 아 참 이것이 깨닫기 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평생을 믿는 자들 속에 하신 일인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몰라도 하나님이 십자가로 믿는 자의 평생 속에 구원을 이뤄가는 평생의 삶이었는데, 믿는 자들이 신앙 생활 중에 부분 부분 조금씩 조금씩 은혜 받았던 것들도 사실은 다 그 일이었었는데, 하나님이 하신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깨달아가는 이 비밀만 몰랐던 만큼은 맞아요. 주를 믿는 다고 하는 저의 신앙생활 속에서 십자가의 의미는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구원하신것만 알았죠. 그 정도 의미 이상은 그 이후에 신앙생활에서 내가 주를 위하여, 받는 십자가의 고난의 의미 이상은 몰랐던 겁니다. 그러니까, 몰라도 내 인생 속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맞기 때문에 성도의 인생 결국 산다는 것 자체가 죽을 일 쌓을 것 밖에 뭐 있습니까. 적고 크고의 차이일 뿐이죠. 몰라도 항상 한계 속에서 은혜 주셨는데, 은혜를 받고 나면 한계가 풀려지는 만큼 하나님이 믿는 자의 인생 속에 구원을 이루시는 십자가만 구원이요. 믿는 자 속에 평생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참여 된 내 인생 속에 구원을 이루시는 것을 십자가로 깨달아가지 못하는 것을 하신 일은 맞아요 그러나 죽음과 부활의 세계가 나누어지지 못합니다. 그런 만큼은 죽어가던 믿는 자의 삶의 한계 속에서 그 고난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참여케 한 내게 십자가를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이 하시는 일로 깨달아가는 과정을 몰랐던 만큼은 은혜 주신 만큼 생명의 능력이 내 육신 속에 그것이 내 안에 나와 관계 된 모든 삶은 인생 속에 문제 해결이나, 축복이나, 증거로 나타났던 만큼, 한계 속에 쉽지 않게 그리스도의 죽음, 죽음과 부활만이 구원을 이뤄가는, 그래야만 육을 가지고 성도가 사는 일에 점점 육에 속한 자가 아닌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이 내게 이루시는 십자가가 아닌, 영에 속한 자로 살아지는 그런 만큼 육신 속에 살아가는 내 수준의 문제와 하나님이 내 인생 속에 구원하셨고 구원을 이뤄가는 삶 속에 실상인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 이렇게 깨달아가지 못하면, 몰라요 저는 이전에 저도 어떤 복음 송가, 바울 처럼 본받기 원했거든요. 본받는다는 것이 뭡니까? 이렇게 살면 그게 믿음 인줄 알고 맞아요. 이렇게 사는 것이 믿음이에요. 중요한것은 복음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셨고, 평생을 이제는 십자가의 그리스도 죽음과 부화에 참여 되는 만큼 믿음으로, 저도 신앙 생활 하면서 증거도 있었고 많은 하나님의 역사도 있었고, 그런 만큼 하나님 살아계시다는것은 아는데, 내가 믿지 않고 있더라고요. 살아 계셔서 믿는 자 속에 이전에도 하셨고 지금도 하고 계시고, 나의 평생에 그 분이 하시는 일인데도, 하나님 살아계신것도 알아요. 그 분이 나와 함께 하신 것도 알고, 실제 믿음과 삶은 바울처럼 본 받으려고, 열심히 살면 믿음 인줄 알고 믿었죠. 살지도 못할 뿐 아니라, 흉내 내서 될 수 있는게 아니거든요. 나중에는 살아질수없는 어찌할수없는 육신 임이 아직도 모양이 있다면 외식일 뿐이고, 나중에는 외식 마저도 겉치레 아닌가요? 아는 것이 믿음으로 착각 하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의 믿음과 삶은 점점 선과 악의 눈이 밝아, 이걸 피하지 못합니다. 왜? 몰라도 육에 속한 자로 살아가는 만큼은 선과 악의 기준을 자유 할수 없어요.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 여러분과 관계된 부부든 자식이든 성도와의 관계든, 사람들의 맞고 틀린, 어떤 기준 속에서 판단이 되지 않습니까? 판단하지 말라고 하니까 판단하지 않아야지, 노력하면, 있어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괜찮은 모습으로 자기 얼굴을 포장할 수 있겠죠. 잘 하면 느낌까지 눈치 못채게 할수 있겠죠. 아니요. 그것이 우리는 맞기 때문에 계속 노력하고 그게 내 인생을 맞는 것으로 길들여 가면 어느 정도 성품화 되고, 그것이 나의 인격처럼 나타날 수 있어요. 나이 먹어갈수록 어떻게 되는지 잘 보세요. 점점 드러날걸요. 이전에는 내 인격 나의 노력으로 어찌할수없는 한계가 당신의 인생 속에 노후에 잘 나타나요. 아니 그렇게 노력해도 안 살아지는 정말로 풀수없는 한계 오면 다 드러날걸요. 그때는 놀라지 마세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이게 나인가? 평생 모르면 정말 새 술인 복음을 헌 부대에 담는 그런 면에서 속일 수 없는 술도 새고 부대도 터져 못쓰는 것을 그때라도 깨달으세요. 제가 왜 모든 메시지 중심이 십자가입니까? 여러분 믿지 않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니면 절대로 구원 못 받아요. 거듭나지 않으면 지옥 가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 세상에는 주 예수의 재림 때까지 불신자와 성도가 공존하며 살아가거든요. 믿는 자의 삶이 무엇입니까? 십자가로 날 구원 하신 것만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구원하신 영적 실상으로 보면 다 끝난 겁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가 되어서, 에베소서 2장에 이미 우리를 하늘에 앉혔다고 하잖아요. 그게 영적인 실제 에요. 그 영적 실제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거죠. 왜 구원 받은 성도를 바로 천국에 부르지 않으시고, 세상에 두시고 우리를 천국 부르는 그날까지 하시는 일이 뭡니까? 앞서 말씀 드린 것처럼 내게 구원을 이룰 줄 아는 고로, 저는 이것도 사도 바울이 빌립소서신을 로마 감옥에 고난을 당하면서, 사도 바울 서신서를 보면 일찍 기록된 것은 이런 면에 밝히 드러남이 부족합니다. 그 말이 빌립보서 만큼은 구원을 이루라. 전체 빌리보서 주제를 말하라면 빌립보서 2장 12절이에요.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2:12) 사람들 마다 다 아마 빌립보서 보는 전체 주제가 다를 겁니다. 저는 복음을 정말로 십자가로 깨달아 가는 만큼 이런 부분들이 바껴지더라고요. 그런 면에서 빌립보서 1장 얼마나 잘 말해 줍니까.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을 통하여, 저들이 겉치레로, 무슨 방도로 하던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 저는 믿는 자들이 주 예수의 재림 때까지 이 믿음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해요. 나 개인 속에서, 나도 아직도 육에 속한 만큼은 내 수준 때문에 할수없지만 그런 나의 인생 속에 구원을 이뤄가는 것을 십자가로 깨달아가는 만큼은 맞다 나를 천국 부르는 날까지 이것 때문에 기뻐하고 기뻐해야겠구나, 노력이 아니라, 구원을 십자가로 하나님이 내 인생 속에 모든 일속에 구원을 깨달아가는 만큼 조금씩 조금씩 되어지는 나를 발견하게 되니까 그런 면에서 빌립보서 1장 6절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이 말이 뭐겠습니까? 구원을 시작하신거죠.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그 복음을 영접하고, 물론, 착한 일을 시작한 그 착함은 그때부터 빌립보 교회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 받은 첫날부터, 이 빌립보 교회만큼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그 일에 물질로 기도로 실제 참여로 그런 의미를 가지고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이것이 구원과 떨어져 있습니까? 주 예수의 날까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죠. 적게는 우리 개인 속에 적용한다면 우릴 천국 부르는 그날까지, 우리 안에서 구원을 시작하셨고, 그 구원이 있었기에 복음을 위한 헌신이죠. 그것이 언제까지, 주 예수의 날까지, 1장에 얼마나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까.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여러분,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로 구원하시는 일은 우리가 구원 받았을 때도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되고, 평생의 믿는 자의 삶 속에 십자가를 통해 구원하는 삶도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되요. 가끔 가다 말씀 드리죠. 혈과 육이 아니라고, 오직 나의 신으로 말미암아, 우리 구원 받은 자 속에 성령 하면 어떻게 이해 합니까. 성령의 충만 받으면 세상을 이길 이것만 생각 하잖아요. 거기에 뭐가 빠졌어요? 구원을 이루는 십자가의 능력, 이게 성령의 도우심이 아니면 안되는데 지금 믿는 자의 성령 하면 성령 충만 받아서 그래야 성도가 세상 이길 능력을 가지고 살수 있다. 그래서 성령 충만 만 구하죠.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와 마귀 역사가 분별이 안되는 겁니다. 여러분 성령의 역사 능력과 마귀 역사 능력, 무엇으로 구별할 수 있는 줄 알아요? 성령의 역사는 반드시 구원과 관계 되요. 마귀가 능력 있는데 심지어는 마태복음 24장에 말씀 하신 것을 보면 점점 주의 재림의 때가 가까올수록 마귀는 더 큰 능력으로 그래서 택하신 자들까지 미혹한다. 왜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럼 우리 기독교 안에 교회들 속에서 성령 하면 무엇을 강조점 두고 말합니까. 정말로 구원을 받아야할 면에서 성령을 말합니까? 또 구원 받은 자들 속에 성령, 성령, 성령 충만 좋습니다 만은 사도 바울이 말하는 의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내게 구원을 이룰 줄 아는 고로, 그런 의미로 성령을 말합니까. 이게 참 안타까운 거죠. 대부분 교회 간증하면 구원의 실제, 계속 성도들이 예수를 믿어, 거듭나는 그런 사실과 또 구원 받은 성도들이 조금씩이라도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 되는 만큼 속에 속 사람이 점점 새로워지는 그런 만큼 육에서 영으로 영적 변화를 이뤄가는 일들 속에서의 성령의 실제성을 말하고 있는 겁니까? 성령의 강조점도 다르고 교회들이 자랑하는 것이 달라요. 뭐 우리는 교회 오면 복 받는다. 우리 교회는 이런 역사와 증거가 일어난다. 우리 아까 288장 찬송을 불렀죠.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 일세 나 사는 동안, 정말 무슨 간증입니까? 거듭남이 간증이에요. 또 십자가에 참여 되는 만큼 삶에 살아가는 세계가 조금씩 조금씩 죽고 사는 세계가 바껴가는 만큼 삶의 거듭남이죠.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얼마나 빌립보를 통해서 잘 말해 줍니까? 내게 구원을 이룰 줄 아는 고로, 저도 조금 헤매다가 조금씩 이 비밀을 깨달아 가다 보니까, 이전에 가지고 있던 일반적인 의미로써의 이해만 아닌, 야 이게 보통 말이 아니구나, 아니 성경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증거해주고 있었는데 모르고 내 수준 속에서 이해 했고 증거할 수 밖에 없었구나, 얼마나 성경이 놀라운 겁니까. 그래서 빌립보서 2장은 1장 시작하면서 그러므로 11절을 마치면서 그러므로, 그러므로가 뭐에요? 접속사 잖아요. 앞에 내용이 있기에 앞에 것이 원인이라면 그것을 말할 수 밖에 없는 사실, 결과 과정 일수도 있고 계속 그러므로 그러므로, 결론부터 말하면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3장이 뭐에요? 구원을 이뤄가는 실제를 잘 말하면서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빌3:15-16) 누가 온전히 이룬 자가 있습니까. 그래서 그 앞에 말한 거예요. 내가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얻었다 함도 아니다. 잡힘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 간다. 그래서 그러므로 말한 겁니다.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 할지니, 어떻게? 바울처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 아니 그 뒤에 절,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그런데 참 이 과정이 쉽지 않죠. 저도 참 지금까지 과정이 쉽지 않았어요. 그런데 갈수록 사도 바울처럼 나의 고백이 되어지더라고요. 그래서 가끔 가다 말씀 드리잖아요.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하라고, 그리고 이것도 달리 생각 하면 나타내신다고,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는 겁니다. 또 이와 같이 우리를 본받는 자를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은혜 받아가는 만큼은 이건 우리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 만큼 아직은 육에 속한 만큼의 우리 수준은 어찌 선과 악에 눈이 밝아 볼 수 밖에 없는 세계가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쉽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은혜 받아 온 만큼은 이전 보다 육에 속한 만큼의 어찌할수없는 세계에 보는 것, 보는 것 속에서 우리 안에 반응, 판단을 피할 수가 없는데 정죄도 피할 수가 없는데 그런것속에서 반응하는 모습도 피할 수가 없는데 이전 보다, 낫습니까? 잘 보세요. 나아진 것도 있을 것이고 또 아직 잘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전 보다 나아졌다라는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상관없이 하신 일을 조금씩 헤매면서 십자가로 깨달아온 만큼은 뭔가 조금은 영적 사실 속에서 믿어지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전 보다 조금 나은 것 같다. 잘 모르겠다.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그것은 더 심한 것 같다는 것은 포장되었던 세계가 포장 되었던 세계가 포장이 풀어지면서 드러나는 현상이고요. 그런 과정을 거처 가다 보면 이전 보다 지금이 지금 보다 나중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남이 달라지고 변화되는 육신의 수준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육신이라는 것은 그 세계 한 순간 잡혀 버리면 육신은 나타나는 하나의 껍데기기 때문에 변화된 것 같이 보이지 않을 수도 있고 더 심한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다는 것도 잊지 마세요.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구원을 조금씩 십자가로 깨달아 가다 보면 하나님이 하시는 영적 실상이 믿어지는 만큼 그것이 믿음이거든요. 우리는 보이는 것을 무시하지 않아요. 보이는 것을 통해서 영적 실상을 바로 깨달아 가는 것이죠. 그러는 만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 육신의 수준 속에 나타나도 육신의 수준이 전부가 아니죠. 나타날 수 밖에 없는 것이고 속히면 어찌할수없는 그래야 우리가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자랑할 수 없고, 중요한것은 이렇게 은혜 받아 가시다 보면 아직도 육에 속한 만큼 우리 수준 때문에 반응이 있어요. 그런데 신기한 것은 정도 차이지만 사도 바울 처럼,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던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게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일의 복음 전파죠. 이것은 우리의 맞고 틀린 세계에 갇히는게 아니에요. 판단과 정죄 속에 묶이지 않죠. 그게 하나님 사랑이에요. 변함없이 하시는 일, 그래서 제가 일본 집회 때 그런 말씀 드렸죠.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다가, 고난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은혜를 받은 것 만이 아니라고, 사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복음 전하다가 고난 받은 것이 하나님 앞에 떳떳하기 때문에 이런 은혜 받고 있다고 생각 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오히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 자기의 죄를 더 죄로 발견하는 죄가 더 더하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바울의 상태였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요. 그 말은 육신은 별수없어요. 선과 악에 눈이 밝아 그런 만큼은 하나님이 항상 하시는 일이지만 복음이 가리워지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세계 속에서 못 빠져 나오는 거예요. 그런 만큼 나도 판단과 정죄를 피할 수 없고 나와 관계 된 사람들 속에 판단과 정죄를 피할수없는 거예요. 그 만큼은 마귀에게 이용당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죄 가운데 구원하신것이고요. 믿는 자를 세상에 두시고 항상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통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거든요. 일본 집회 때 말씀 드렸죠. 이렇게 복음을 깨달아가면서 믿는 믿음 생활이 아니면 누구도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금송아지 하나님 믿는다. 선과 악에 눈이 밝아, 좌로 우로 치우치는 거죠. 지금 그런 가운데서 여호수아 갈렙은 이런 비밀을 누렸을 것 같아요. 그런 모세가 있었기 때문에 여호수아 갈렙이 그런 비밀을 함께 누렸다고 생각 되고요.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 이게 성도의 삶이에요. 빌립보서에 많이 강조한 단어 중에 하나가 그것에요. 바울도 기뻐한다고 했고 또 빌립보 교회를 향해 항상 기뻐하라고 했고, 그 기쁨이 뭡니까? 우리 육신의 기준 속에 충족되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기뻐하는 겁니까? 그럼 반대 기준이 오면 기뻐할 수 없어요. 사도 바울은 지금 바울이 고난 당한 그 일을 통해서 다수가 복음을 담대하게 또 사랑으로 전하는 그걸 보며 기뻐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들은 참으로 전하고, 바울을 괴롭게 할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자들 속에서 괴로운 게 아니죠.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던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 그런 만큼 믿고 있는 인생을 사는 줄 알고 있으면 됩니다. 그런 만큼 여호와 하나님을 바로 믿고 섬기고 있는 줄 아시면 됩니다. 그렇지 않은 만큼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으세요? 여호와 하나님이 맞아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다고 하지만, 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게 아니에요. 왜?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의 길이거든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다. 믿음 생활이 뭐에요? 믿는 자를 구원하신것만 아니라 평생을 우리 인생 속에 그 말은 평생에 믿는 자의 삶에 모든 일 속에 그리스도는 항상 구원의 길의 되야죠. 새롭고 산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거거든요. 그런 자들은 조금씩 조금씩 이지만 정도 차이지만, 이 고백이 뭔지, 정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 드렸죠. 사도 바울이 1장 13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 그죠. 여러분 구원을 하나님이 내게 이뤄가시는 이게 간절한 기대와 소망으로 이렇게 느껴지시고 그렇게 살아지셔야해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고, 부끄러움 반대는 자랑이잖아요. 어떤 일 속에 맞고 틀린 일 속에 부끄러움이 있는 거거든요. 바울은 부끄럽지 않고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라니까요. 복음 전하다가 갇혔기 때문에 부끄러움이 아닌게 아니라니까요. 여러분 실제 믿음 생활이 어떻습니까? 내가 이번 일본 집회 때도 말씀 드렸죠. 나 이전에 참 그렇게 잘 믿어 보려고 했는데, 늘 발견되는것은 죄인이잖아요. 부족 함이요 연약 함이죠. 하나님 앞에 그 연약함이 정말로 더 하나님을 의뢰 하게 되는 연약함이 됐나요? 안되더라고요. 지금은 참 신기하죠. 연약함이 있어요. 연약함 보다 더 하나님을 의지 하는 그런 내가 발견됨이 커져요. 지금도 전과 같이 담대 하여, 그 말이 뭡니까? 선과 악의 눈에서 자유 하는 만큼 담대 함이 나오는 겁니다. 왜 하나님이 모든 일 속에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셨고 이미 그 구원의 일 속에 새롭고 산길이 찾아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전과 같이 담대 하여, 살든지 죽든지, 여기에 다 들어있는 것 아닙니까? 좋든 나쁘든 잘되든 안되든 있든 없든 한 마디로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어지기를 원한다. 이 존귀함이 뭔지 아시겠죠. 하나님이 내 인생에 모든 일속에 십자가의 죽음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 되어져 가는 만큼 내가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한다고 존귀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인생 속에 그리스도를 존귀 하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뒤에 말하죠.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라. 여러분 이게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말한 겁니다. 만일 내가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에 열매라면 나는 무엇을 택하든지 알지 못하겠다고, 열매, 참 사도 바울이 잘 말해주는 것 같아요. 그렇게 복음 전하던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힌 것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는 자들도 있지만 비방하면서 바울을 괴롭게 하려고 전하는 자들도 열매잖아요.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다. 둘 사이에 끼었다는 말이 뭡니까?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일이 있고 그 일은 한쪽에는 고난이 있고 고난 속에 나타난 열매들 얼마나 많은 열매가 있습니까. 우리 이전에 한쪽에 좋은 것만 말하고 있는데도 안 좋은 것은 감췄죠. 그게 외식이에요. 그게 속임이에요. 거짓이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내게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일 속에서 그럼 얼마나 축복입니까.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좋으니라, 믿는 자는 그렇죠.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생 속에 구원을 이루는거죠. 내게 구원을 이룰 줄 아는 고로, 그렇죠.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있기에 빌립보 교회 속에서도,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함이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빌1:25) 제가 이번 일본 집회 마치면서 어느 목사님에게 톡을 보냈습니다. 참 그동안 제가 당한 일과 교역자들 성도들 속에 일본 집회 진행하면서 정도 차이지만, 복음은 시대와 상관없이 동일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일 속에 제 안에 또 교회 속에 성도들 속에 그것을 확인하게 됐다고 그래서 제가 왜 지금 2장 1절을 읽어 놓고 또다시 말할까, 1절에 그러므로 가 나오잖아요. 1장의 내용을 가지고 우리는 2장 1절로 1절 부터 말하는 사도 바울의 말을 바로 이해 하지 못하면 이게 떨어진 겁니까? 여러분 이걸 아셔야해요. 성경,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말씀 속에는 장과 절이 없어요. 장과 절은 언제 생겼냐, 성경의 장은 13세기에 스티븐 랭톤(Stephen Lengton 1150-1228)이라는 사람이 만든 겁니다. 처음에는 랭톤만 만들겠습니까? 그냥 기록된 말씀이에요. 그런데 성경을 찾으려면 얼마나 불편합니까. 예수님도 기독되었으되 라고 말했지 몇장 몇절 하지 않았어요, 랭톤이 하다 보니까 편하니까 각자가 만들었네, 통일성이 없잖아요. 더 혼란스럽죠. 그러다 보니까 가장 유력하게 랭톤이 만든 장을 통일 시키는 것이 좋겠다. 그래서 통일되게 된거죠. 절은 16세기 때에 절을 만든 거예요. 그런데 이후에 어떤 사람이 만든 절을 통일 시키면서 성경의 장과 절이 만들어지게 된 겁니다. 그래서 1장과 2장이 떨어진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을 장을 편리성을 가지고 보되 성경은 기록되었으되 문맥 속에서 연결해서 봐야 합니다. 그러므로 1장에 사도 바울이 말했던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그리스도 안에 이걸 1장의 사도 바울이 말한 내용과 상관없이 그리스도 안에 라고 하면 안되겠죠. 내게 구원을 이룰 줄 아는 고로, 그렇죠.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 함이라, 이 둘 사이에 끼었는데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 된 만큼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그걸 사도 바울 서신서에 가장 많이 기록된 의미 속에 단어들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주 안에 그 안에서, 왜 바울이 그것을 그렇게 강조 한 줄 아십니까. 우리 이전에 이거 주안에서,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모든 일속에 내게 구원을 이루는 거기에 십자가가 있잖아요. 십자가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 일수 밖에 없다고요. 이게 얼마나 중요합니까. 자 시간이 갔기때문에 오후에 이어서 증거하겠습니다.